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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파 "흑색 태양" 대하서사소설 출판하다...
2017년 02월 18일 19시 55분  조회:4155  추천:0  작성자: 죽림
100년 가족사 『흑색 태양』 출간한
김파 시인
(ZOGLO) 2017년2월16일 
 
▲ 최근 대하소설 『흑색 태양』을 출간한 중국 조선족 김파 시인과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조천현]
 

흑색태양 1
흑색 태양. 2
흑색태양 3



“하루는  안중근이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중국 조선족 시인 중 첫 손에 꼽히는 김파(75) 시인은 최근 한국에서 출판한 대하소설 『흑색 태양』(전 3권, 도서출판 백암)에 대해 이같이 소개하고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김파 시인은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한국에서 개인 시집을 여러 권 냈고, 특히 ‘조선족 백년문학사에 유일한 개인 명시집’인 『김파의 명시집』이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됐다. 또한 그의 대표작 ‘돌의 음악’ 시비가 2014년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세워졌고, 지난해 11월에는 제3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4개 이상의 주제 사상을 보여주는 다원적 ‘입체시’ 이론을 정립했고, 이번 대하소설 역시 ‘입체소설’로 썼으며,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2010년)과 장편대하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상,중,하)』(2006년)는 뜻깊은 역작이다.

김 시인이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대하소설 『흑색 태양』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까지 3대에 걸친 그의 가정사를 담았지만, ‘특수한 가족 경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한의사 유승렬 의원이 안중근 의사와 교분이 깊었고, 유승렬 의원의 아들이자 그의 외삼촌이 되는 유동하 선생이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며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고 밝혔다.

중국 조선족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추천의 글’에서 “전반 인류 역사의 100여 년 사이의 창상지변을 보여준 기적적이고 경이적이며, 미증유적이며 돌파적인 종래 없던 대형 거대서사”라며 “<흑색 태양>은 해체된 사회주의와 그 창시자와 추종자를 상징”했다고 평가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연해주와 만주를 떠돌며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고, 해방 후에는 중국에 남겨져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에서 ‘청산 대상’이 돼 수난을 겪는 과정, 그리고 개혁개방을 맞아 변화된 세태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생한 역사는 우리 민족 수난사의 한 켠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를 좌우명으로 삼고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고 여전히 시혼을 불태웠다.

또한 아직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도 10권이 넘는다며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남북이 쌍방에서 남북평화통일촉진회를 내와 가지고 그 기초 상에서 이제 남북이 서로 토론해 가지고 통일했으면 좋겠다”며 3.8선에 △경제발전 공동시범구역 △자유 거주지 △남북평화통일학원을 세우고 “북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은 외군을 철수시키고 이래서 유엔에서 동의하는 지구상에서 그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는 국가가 돼서 세계의 평화성지로서 만들자”고 제안했다.

안중근 의사와의 특별한 인연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특히 한중 수교과정 등 그의 가족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바다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다음은 지난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김파 시인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가급적 그의 입말을 살려 정리했지만 두음법칙 등은 맞춤법에 따랐다.

 

“100년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

   
▲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 첫 손에 꼽히는 김파 시인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함께 한 유동하 선생의 외조카이다. [사진 - 조천현]

□ 통일뉴스 : 유명한 시인인데, 첫 대하소설인 『흑색태양』을 한국에서 출판했다. 주로 중국 연변지역에서 활동했는데 한국에서 출판한 이유는?

■ 김파 시인 : 『흑색태양』은 한국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이 소설을 출판하려고 마음 먹었댔다. 그런데 중국에서 출판 못하겠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중국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킨다.

내용을 보면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여기에는 그 100년 사이의 우리 인류역사 전반 내용이 다 여기 담겨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레닌이 창시한 사회주의 실패, 그 다음에 중국의 사회주의 실패와 개혁개방 전반 내용이 다 있다. 중국에서 출판하기 곤란하다.

미루다가 3년 전인가 써서 완성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출판 못하고 있다가 할 수 없이 한국에 나와 이번에 출판하게 됐다.

□ 연변문학과 한국문학이 어투나 표현 방식 등이 다를 것 같은데, 한국 출간에 어려움이 없었나?

■ 있었다. “이걸 한국에서 출판하자면, 한국 식의 소설 수법으로서 고치면 어떻겠는가?”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내용은 그대로, 소설 기교나 수법을 다 그대로 출판하면서 어법과 철자법은 여기대로 고쳐도 좋겠다고 내 그랬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 그러더라.

왜서 그런가 하면, 그대로 출판해야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지 여기대로 다 고치면 한국 소설이지 중국 조선족 소설이 안 된다. 이색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다. 그래서 동의해서 출판하게 됐다. 출판사에서 여기 어법과 맞춤법 대로 다 고쳤다.

□ 책이 나왔는데 출판 기념회 계획은?

■ 원래는 해야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뭐 출판기념회를 내가 하긴 곤란하고, 그래서 지금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상황 보면서 며칠 지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하려고 한다.

□ 시를 주로 쓰다 장편소설을 썼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 어려움이 있었지 왜 없었겠나. 근데 장편소설 쓰기 전에 연습하느라 단편소설들 너댓편 써봤다. 발표는 안하고. 그 다음부터 시작했다.

쓰기는 반년에 세 권 다 썼다. 왜 그런가 하니까, 사실 너무 듣고 너무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에 다 익어버렸다. 우리 어머니랑 부탁하고 말한 지는 대단히 오래다.

□ 어머니 부탁도 있었는데 왜 좀더 일찍 쓰지 않았나?

■ 이짝에 시들을 쓰느라고. 장편서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 그때 머리 다 빠졌다. 그런데 ‘천년 고국 고구려’가 3권인데 천여 페이지 넘는다. 28대 왕조를 썼다.

처음에는 중국 출판사에서 출판하겠다 하더니 못하겠다고 해서 5,6년 넘어 묵었다. 그래서 여기서 출판했다.

중국 집안현에서 2004년 7월 1일에 호태왕비를 유네스코에 문물로 등재했다. 그러면서 중앙에서 문건으로 지시가 내려왔는데 ‘고구려에 대해서 한 페이지만 논해도 그 책은 못 찍는다. 만약 어느 사장이 고구려에 대해서 출판했다면 철직한다’. 그래 놓으니까 몽땅 얼어붙은 거다.

그전에는 교과서에도 고구려란이 나왔고 우리 역사를 논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논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교과서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없애버렸다.

□ ‘흑색 태양’도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역사적 사실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사료들을 많이 공부했을 것 같다.

■ 어려움이 많았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그저 망탕 쓰면 안 돼 거든. 자료들을 다 맞춰보고 썼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마음대로 쓰겠나. 아마 좀 틀린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 김파 시인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작고한 어머니의 구술을 토대로 대하소설로 형상화 했다. [사진 - 조천현]

□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참여한 유동하 선생의 후손으로 안다. 100년의 역사를 3대에 걸친 가문사로 썼는데, 유동하 선생과 이 소설의 관계는?

■ 유동하는 우리 어머니 오빠다. 소설에도 나오는데, 유동하 부친 유승렬은 1898년에 러시아로 이주해갔다. 아주 유명한 중의(中醫)였다. 그때 해삼위, 지금 블라디보스톡에는 우리민족들이 집중돼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요청해서(받아서) 거기를 가서 의사 노릇하게 됐다.

그런데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유세하면서 시베리아 일대를 돌면서 감기 걸려 왔다. 우리 외할아버지네 집에 눌러 있으면서 한쪽으로 약을 달여 마시면서 한쪽으로 나라 형세 이야기를 했다.

그때 우리 어머니가 아마 한 여섯살 쯤 됐을 거다. 그런데 앞에서 먹을 갈아주면 안중근 의사가 붓글씨도 쓰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귀엽다고 하면서 각전을 주니까 우리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눈깔사탕을 싸(사)다가 입에다 하나씩 다 넣어주고 웃고, 앞에서 노래하라고 해서 독립 노래 부르고, 아주 귀엽다고 그랬다.

유동하는 수분하 쪽에서 러시아 철도고등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유동하가 러시아의 철로보(철로신문)을 가져왔다. 이등박문(伊籐博文), 이또 히로부미가 어느날 할빈(하얼빈)역에 도착해서 러시아 대신과 담판하러 온다는 소식이 거기에 간단하게 실렸거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말 아는 사람을 하나 구해야겠다” 해서 우리 외할아버지 집에 들렸다. 그래서 “야를 데려가라”. 그래서 우리 유동하 삼촌이 따라 나선 거다.

□ 유승렬 의원 등은 모두 본명을 쓴 건가?

■ 다 원명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 외할아버지 유승렬이 쌍둥이다. 형님은 유태렬이고. ‘묘금두 류(劉)’, 유소기(劉少奇) 유자다. 우리는 거기(연변)서는 류라고 한다. 여기서는 유라고 하더라.

□ 선생은 직접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안중근 의사와 유동하 의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나?

■ 다 어머니 말씀이다. 90년도에 교통사고로 사망됐다. 늘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 이걸 썼다.

□ 가족은?

■ 5남매인데, 내가 가운데 남자 하나다. 원래 맨 위 맏이가 남자 있었는데, 광복 전에 조선으로 나왔다. 어느 군관학교인가 거기 댕긴다 하더니 후에 종무소식이다. 지금은 전혀 모르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그저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다.

□ 안중근 의사와 유승렬 의원과의 관계로 시작돼 유동하 선생으로 이어진 인연인데, 이번 대하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 이걸 왜 쓰게 됐냐면, 기본 동기가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 우리 어머니가 참 이야기 잘 한다. 그러나 후에 쓰겠다고만 했다.

후에는 우리 형제들도 “너 밤낮 글쓴다면서 이런 가정소설도 안 쓰고 뭘 하는가?” 촉탁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 이건 소설재료인데 꼭 써야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거다.

우리 가정이 6국에 흩어져 살았다.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폴란드, 사방데 흩어져 살면서 100년 동안의 역사를 전부 경과한 거다.

“모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 2016년 11월 13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개원호텔에서 한국윤동주기념사업회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주최한 제3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서 김파시인이 '다이아몬드 게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됐나?

■ 시를 쓴 지가 오래다. 왜서 시를 썼는가 하면,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중국에서 토지개혁 혁명 때 청산 맞았다. 청산이란 게, 재산을 다 몰수해 가고, 그리고 군중 앞에서 막 때리면서 이랬다. 그래 가지고 부상당해 돌아온 다음에 전염병에 걸렸다. 아마 한 두어달 앓다가 사망됐다.

그래서 겨울에 사망됐는데, 관도 짤 것도 못 되고 관 비슷하게 아무 널이나 갖다 만들어서 우차에 싣고 어머니하고 내가 묘지로 갔다. 그런데 (땅을) 파려고 드니까 팔 수가 없다. 흑룡강성은 3월달이 대단히 추울 때다. 그래서 그대로 놓고 그 위에다 눈 덮어놓고 이듬해 봄에 가서 그걸 다시 파서 묘를 세웠다.

돌아오면서 강변에서 땔감으로 쑥대를 베고 이러는데 그때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는데 기러기들이랑 와서 강변에서 놀더라. 그걸 보고 왔는데 학교에 가니까 작문시간에 ‘새봄’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라하더라고. 그래서 내 강변에서 본 사실을 죽 작문 지었다. 그런데 그게 모범작문이 돼서 학교 벽보란에 떡 붙었다. 그기에 힘을 입어 가지고 ‘아 이거 되는 모양이다’. 그래 후에는 계속 책 보고 작문짓는 연습했다. 작문시간에 내놓으면 내건 잘 썼다고 늘 붙여줘 힘 입었다.

그러다가 초중(중학) 2학년 땐가 중국에서 대약진이 있고 막 이러면서 학교에서도 코크스를 굽는다고 석탄을 가득 재놓고 전 운동마당을 반마다 나눠줬다. 거기다가 석탄을 재놓고 불을 땐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타면 물을 부어 코크스를 만든다. 그래 그 코스크 만든 것을 강철공장에 보낸다. 강철 뽑아낸다고. 그게 그때 대약진이었다.

학교에서 그때는 공부도 안 하고 전부 그랬다. 우리 반에서 만든 코크스를 산더미처럼 재놓았는데, 내가 받아서 그 위에다 쏟아놓고 받아서 쏟아놓고서, “다 쌓았다!” 하더라고. 갑자기 시가 생각나더라. 코크스 산에 올라서니까 산 너머 구름 저편에 모(택동)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목단강 조선일보>에 보내 이튿날 떡 나갔다. 아 그게 났다고 모두 야단이더라.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개인 명의로 시집이 발간된 배경은?

■ 맨 처음 82년에 한꺼번에 시집이 쏟아져 나왔다. 서정시집 ‘흰돛’이 나오고 아이들 시집이 한 해에 두 개 나왔다. 하나는 ‘해순이와 달남이’, 그 다음에 ‘신기한 피리’, 이게 출판되었다.

모두 깜짝 놀라서 “야, 저놈이 뭐 한다” 야단났다. 그게 떡 출판되면서 힘 얻었다. 그 다음에 이걸 후에 여기 한국에서도 다 재판했다.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이 드문 일인가?

■ 아주 힘들다. 그때 아마 하나는 그 사람 시 능력도 보고 두 번째는 경제 문제다. 중국에서 그때만 해도 시인이 출판비를 내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시가 좋으면 시집을 묶어서 출판해줬다. 그러니까 돈을 국가에서 부담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히 좋은 시와 어지간한 사람은 내 안 준다.

□ 2014년에 도문에 ‘돌의 음악’ 시비를 제막했고, 2016년 윤동주상을 수상했는데, 최삼룡, 최룡관 선생 성함이 많이 나오더라.

■ 최삼룡 선생은 내가 시를 쓰면서부터 나를 중시했다. 자주 얘기도 하고, 나의 시에 대해서 그 다음부터 전문 연구했다. 그리고 내 시집 내면 거기다 서언 쓰고 시집 평론하고 계속 이렇게 한 40년동안 같이 지냈다.

이러다가 그거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니까 이렇게 두꺼운 원고가 됐는 모양이다. 그래서 몇 년전에 ‘김파론’이라고 이렇게 두껍게 냈다. 역시 한국에서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최용관 선생은 자기 시에서 자기주장이 대단히 억센 사람이다. 꺾지 않는다. 현대시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막 이끌면서 나왔다. 그래서 수태 보수파한테 욕먹고 비평맞고 몇 번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꺾지 않았다.

요즘은 신문사 퇴직했는데, 문학하는 시인들을 데려다 놓고는 이론 강의해주고 시인들 많이 배양해냈다. 하이퍼시를 쓰는 사람을 많이 배양했다. 이번에 하이퍼시로 중국 소수민족 문학창작 준마상을 탔다. 상금도 대단하다.

최룡관씨가 나하고 왜 맞냐면, 나는 전위성, 개척성, 창조성이 있는 게 시라는 거다. 언제나 새롭게 쓰고 부정이 부정으로 계속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보하게 되면 시가 낡아서 발전 못한다. 그래서 그분하고 나하고 관점이 맞다.

□ 전업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80년대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한중관계가 밀접해졌다. 한국에 진출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달라.

■ 내가 처음 <송화강> 잡지에다 “유동하와 그 동료들” 제목으로 안중근과 유동하 같이 할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하는 전반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그대로다.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온 한국교수가 이 잡지를 보다 이걸 발견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우리 어머니 전반 이야기 다 듣더니 대단히 감동하더라.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하고 직접 연관돼 살아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우리 어머니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때 돌아가면 한국 유씨 종친회 회장을 만나서 우리 어머니를 한국에 초청해서 역사이야기를 나누게끔 연결해 줄테니까 기다리라 하더라. 정말 얼마 안 있어서 요청장 보내왔다. 그래서 86년도 봄에 처음으로 우리 어머니 모시고 내하고 둘이 왔다.

유창순 전 총리와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숱한 기자들이 막 사진찍고, 그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그때 그 과정을 좀 이야기해 달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강연대에서 아마 한 한시간동안 이야기했을 거다. 어머니가 원래 이야기 잘 한다. 후에 텔레비전으로 10여분 되게 내보냈다.

그런데 나를 자꾸 데려다가 강연시키더라.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 자꾸 그런다.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가는 돌아가서 정치범으로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이야기 못하겠다”고 했는데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동아일보>에서 강연을 2시간 쯤 했고, 그게 소식이 퍼져서 사방에서 요구해서 돌아다니면서 강연하고 그랬다.

□ 당시 한국에서 유동하 선생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 내 생각나는 게 있어서 어머니하고 토론했는데, 유동하는 러시아에서 희생됐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열사증 탈 수 없고, 한국에서도 주겠는지 안 주겠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가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 써서 보내봐라. 혹시 줄런지 어떻게 아냐?”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썼다.

유동하에 대한 사실 쭉 쓰고 “훈장 못 주겠는가?” 그랬더니 며칠 후에 대답이 내려왔는데 대통령께서 지령내렸는데, “해외교포지만 주라”. 그게 계기가 돼서 그 후부터 해외교포 다 주게 됐다.

상장은 규정된 날이 있다더라. “2년마다 한 번씩 주는데 명년에 주니까 그때 어머니 모시고 나와서 타라.” 보훈처의 총 책임자가 찾아와서 쭉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그 후에 폴란드에 있는 유동하 동생 유동주가 그걸 타가지고 갔다.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 김파 시인의 가족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청산 대상인 ‘신빈농’ 계급으로 겪어내야 했다. [사진 - 조천현]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도 겪고 개혁개방 등 중국 현대사를 겪었는데, 일련의 흐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모 주석이 건국한 다음에 1958년부터 농촌집단화로 인민공사를 꾸리고 성시(省市)에서는 공장들을 국영화하고, 이러면서 대약진을 막 일으켰다. 대약진이 실패했다.

그게 어떻게 되나? 아니, 풍년 농사짓게 한다고 학생들 다 동원해서 공부 안 시키면서 심경전(深耕田) 한다고 땅을 1미터 파서 생땅에 씨를 심으니까 노랗게 말라서 안 되는 거다. 흉년이 몇 해 들었다. 그래서 굶어죽은, 기사(飢死)로 죽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학생들까지 학과를 정지시키고 동원해서 코크스를 구워서 강철을 만들어낸다고 하면서 10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잡는다고 이랬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떡 실패되니까 당내에서 이견이 대단히 분분했다. 모 주석이 할 수 없어서 원래 당 주석 겸 국가 주석이었는데 국가 주석 자리를 유소기한테 내줬다. 유소기가 지금으로 말하게 되면 경제부흥을 위해서 ‘3자 1포 4대 자유’를 내놨다. 개혁개방처럼 토지랑 도거리제로 다 나눠줬다.

이렇게 되니까 유소기 위신이 점점 올라가고 모 주석 위신이 하락했다. 그래서 다음번 당내 공산당 주석을 선거하게 되면 자기가 떨어지게 됐다. 가만 보니 안 되겠다. 결국 상해에 가서 자기를 따르는 일파들을 묶어서 일으킨 게 맨 처음에는 반우파투쟁으로 해서 이러다가 그 다음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자기의 적수 유소기를 때려부수고, 그 다음에 등소평도 개혁개방을 주장해 그 사람도 때려부수고 그랬다. 그래서 결국은 문화대혁명으로 모 주석이 이겼다. 문화대혁명 말기에 모 주석이 사망되기 전에 화국봉 불러다가 자기말 잘 들으니까 “나를 계승해서 국가를 영도해 나가라. 반드시 내가 규정해놓은 방침대로 이끌고 나가라” 이래서 화국봉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모 주석도 76년도 사망됐다.

화국봉이 턱 올라왔는데, 이 기회를 타서 화국봉이 다시 등소평이랑 다 올려와서 쓰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그 다음에 개혁개방이다 하고 화국봉이 자리에서 내떨어졌다. 그래서 등소평이 그때 중앙의 권위로 올라왔는데 그분이 개혁개방을 제창했다.

중국 개혁개방한다. 뭐라고 했냐면,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공산당이 자본주의 두들겨 엎고 혁명한다 했는데 안 되는 거다. 중국이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뛰어 넘었거든, 어간에 자본주의를 안 거쳤거든.

중국도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하기 위해서는 요걸 어떻게 대명사를 꾸며내야겠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각 대학 유명교수들 모아놓고 토론시켰다. 한 북경대학의 교수가 뭐라 했냐면, “이거 자본주의라 하지 말고 ‘중국 특색’이라고 하자.” 이걸 등소평이 채용한 거다.

사회주의 모자 쓰면 공산당이 자본주의 경제를 영도하면서 나라를 부강시킬 수 있다. 이래서 뒤에다는 ‘사회주의 현대화’를 썼다. 이것을 ‘신형사회발전론’이라고 한다. 완전히 자본주의도 아니고 완전히 사회주의도 아니고 중간 길로 가고 있다. 중용지도다.

시진핑도 한 말이 있다. 전번에 당 중앙소조회의에서 “우리 중국이 국가 신앙이 없다”. 그전에는 “사회주의 하면서 공산주의를 향해 전진하자”, 공산주의가 국가신앙이었는데 지금은 자본주의도 아니요 사회주의도 아니어서 고민하고 있다. 국가 신앙이 없으니까 앞길이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다.

30년동안 개방해서 중국 경제가 중국 5천년 역사이래 현대 물질문명으로 처음으로 아주 고도로 발전시켜서 백성들에게 물질문명을 만족시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건 정말 거대한 성과다. 외부평론가들은 ‘혼합실용주의 중용지도’, 자기한테 이로우니까 공산주의고 자본주의고 할 것 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엮어서 만든 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곤란에 부딪치고 점점 잘 안 된다. 지금 중국이 실제로 놓고 말하면 허장성세다. 앞으로 세계 패권 절대 쥘 수 없다. 시진핑도 이미 당 회의에서 백성들에게 공개했는데 두 개 백년(200년) 분투해야 중국의 경제수평이 지금 구라파의 발전된 나라 영국, 독일, 이태리, 프랑스 이런 나라를 따라잡을 수 있다. 구라파는 또 앞으로 전진하지, 영원히 안 된다는 말이다.

□ 외부에서는 중국이 공산당이 정권을 쥐고 있지만 사회는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평가하는데 어떻게 보나?

■ 나는 그렇게 안 본다. 체제규정 자체가 왜서 다르다고 보느냐면, 돈 버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방식으로 벌어들인다. 그렇지만 돈을 관리하는 것은 번 사람이 자기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중국은 모든 공사가 몽땅 국가로 돼 있다. 개인으로 된 것은 극히 드물다.

영도는 일당제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당이 아무 사람이나 잡아서 뒤 훑으면 다 탐오했고 부패온상이 됐다. 이 체제 자체가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잘했든 못했든 공산당이 혼자 하니까 감시 감독을 할 수가 없는 거다.

돈 관리는 집체주의 국가경제, 그래서 그 돈 번 것 가지고 군함을 만든다, 포탄을 만든다, 무인비행기를 만든다, 군사무기를 강화하는데다 퍼붓고 백성들에게는 자본주의 국가 같으면 30년 넘어 개방했으면, 평균수입이 적어도 2만달러 이상은 돼야겠는데 그게 4분의 1도 안 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 2014년 4월 1일 중국 길림성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김파 시인의 '돌의 음악' 시비가 세워졌다. 답사하고 있는 김파 시인.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사진제공 - 길림신문]
   
▲ 김파시비 제막식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이 주최했고, 도문시당위와 도문시정부가 후원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이후에 글을 쓰거나 책을 내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지금 내 요걸 말하고 싶다. 내 평생 문학창작에 종사했는데, 좌우명이 하나 있다. 뭐인가 하면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좋은 작품, 그 사람이 쓴 걸 독자들이 믿어준다는 거다.

창작에서 좌우명은 이때까지 시를 많이 썼는데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이거다.

□ 본인의 명시 한 수를 꼽는다면?

■ ‘돌의 음악’이다. 내 명시집도 출판했다. 그것도 중국에서 유일하게 내 하나가 선정돼서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조선족 문학 100년사에서 유일하게 나 하나가 명시집을 냈다. 거의 10여년 돼 간다.

작가로서 인생관은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인생이 두 번 있다. 왜 두 번 있는가? 하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육체적 인생이고 그 다음 하나는 영혼적 인생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혼적 인생이다.

그 작가는 이미 죽어서 저승으로 갔지만 그 사람이 남겨 논 작품은 그 사람 영혼인데, 그 사람의 영혼 작품이 후세에 남아서 후세들의 거울이 돼 훈시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책 자신이 작가의 영혼적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

사실은 지금 출판비 때문에 그렇지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 해도 10여권이 있다. 한 권에 다 200수 이상씩 된다.

□ 한꺼번에 전집으로 내야겠다.

■ 지금 단시집도 못내는 주제에 뭐 전집을 어떻게 내겠나. 안 된다. 지금 책보는 사람 어디 있나. 책이 안 팔리니까 출판하려 해도 곤란하다는 거다.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

□ 한국에 언제까지 머물 계획이고, 이후 계획은?

■ 이번에 한국 온 것은 이 책 출판하려는 것이었다. 3월 달에 아마 대련 집에 가야 한다.

□ 지금 중국 대련에 가족들이 살고 있나?

■ 대련에서 지금 영감 노친이 살고, 큰 딸 아이는 청도에 있고, 두 번째 딸아이는 일본 동경에 있다. 다 시집갔다. 그리고 막내 아들이 지금 청도에 있다.

□ 생활에 지장은 없나?

■ 별 지장 없다. 둘 다 로임(연금)이 있어 생활은 근심 없는데, 책을 출판하자면 그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어렵다.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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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시인 안중근의 려순감옥생활 책으로 펴내려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을 펴냈던 김파시인이 올해 안중근 의거 100주년과 래년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관련 연구서적을 출간할 예정이다.
 
김시인은 당시 려순감옥에서 직원을 지냈던 한 중국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안중근의사의 려순감옥 144일 생활상을 기록한 연구저서를 래년초 출판할 예정이다. 책에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진들과 새로 발견된 유묵도 곁들이게 된다.
 
책에서 안중근의사의 옥사직전의 감동적인 일화도 공개된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하기 며칠전 감옥장이 안의사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안의사는 당당하게 술을 마시며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라고 “장부가”를 불렀다. 감옥장이 며칠뒤면 극형을 받을텐데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안의사는 “민족을 위한 거사를 이루었기에 그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한다.
 
현재 대련시에 거주해 있는 김파시인은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에서 출생, 연변에서 교원, 문화관 창작조 직원을 지냈다. 소학시절부터 시작품을 창작하면서 문학적 기량을 보였던 김파시인은 1986년 처녀시집 “흰 돛”을 출간한이래 꾸준히 창작에 정진하여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 ”겨울나비”, “하얀 메아리 새”, “보라 빛 리유”, “태양의 종소리”, “프리즈속에 비낀 풍경”, 장막가극 “자명고 사랑”, 동화시집 “해순이와 달순이”, 평론저서”립체시론”, 등 10여부의 저서를 펴냈다.
 
김파시인이 안중근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작품을 써온데는 운명적인 연고가 있다.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결심하고 할빈에 도착했을때 그의 로씨야어 통역을 맡았던 18세의 류동하, 그는 안중근의사와 함께 붙잡혀 려순감옥에 갇혀 1년3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출옥후 로씨야를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 1918년 로씨야 경찰들에 붙잡혀 옥사했다.
김파시인은 바로 류동하의 외조카였다. 김파 시인의 외할아버지 류승렬은 한의사였고 안중근의사와 의형제를 맺을만큼 절친한 사이였다고한다. 김파시인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안중근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토대로 김파시인은 안의사에 대한 회고록도 펴냈고 1999년에는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을 료녕민족출판사로분터 출간했다. 이 장편서사시의 창출은 “조선족시단의 제재령역을 넓혔으며 시문학의 공간을 확장하고 조선족시인들의 시적인 저력을 과시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문단은 평하고있다.
 
현재 김파시인은 국제안중근기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장편 서사시로 되살아난 안중근


천심을 재워들었는가
신령의 총탄인가
벼르고 벼르던 복수의 순간
정중에 겨누어 당기는 방아쇠
“땅, 땅, 땅-“
할빈 역두에 울리는 총성
동방의 암야를 찢는다…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이 한국 백암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 지난세기 초, 할빈역두에서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항일구국과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장편 서사시로 시인 김파는 스케일이 큰 서사시를 통해 시인은 영웅 안중근의 삶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시집은 마치도 백두산 상상봉에서 동방대지를 굽어보며 흘러간 력사의 비운을 시줄에 감아쥐고 자유자재로 풀었다 감았다 터쳤다하듯 서정을 펴간다.

현재 대련시에 거주해 있는 김파시인은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에서 출생, 연변에서 교원, 문화관 창작조 직원을 지냈다. 소학시절부터 시작품을 창작하면서 문학적 기량을 보였던 김파시인은 1986년 처녀시집 “흰 돛”을 출간,  시집 ”겨울나비”, “하얀 메아리 새”,  “태양의 종소리”,  장막가극 “자명고 사랑”, 동화시집 “해순이와 달순이”, 평론저서”립체시론”, 등 10여부의 저서를 펴냈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쳐왔다. 

평론가들은 “이 서사시에 펼쳐진 화폭에는 20세기 초 동양 즉 중국, 일본, 로씨야 원동지구를 망라한 아세아 동방의 모습이 사실주의적인 펼치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평화의 발전이 시대의 주류로 거세차고 흐르고있는 현시대에 력사의 교훈을 명기시키고 오늘을 재 확인하는 자세를 보이게끔 하는데서 이 장편서사시는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평했다.

김파시인은 또한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상무부회장으로서 다년래 안중근의사에 대한 연구론문들을 대량 집필, 올해에도 안중근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관련 연구서 “백년의 얼- 충혼 안중근”을 출간했다.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은 1999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로분터 출간된바 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11-01 
[비평]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 비교 
 2009-09-07 

                                                     /김 관 웅 

김파는 자기의 이른바 《립체시》와 《립체시론》을 모더니즘시문학보다 한수 우위에 있는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그러면 김파의 이 고무풍선 같이 부풀려진 자아감각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가를 프랑스 립체파 시인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 비교를 통해 보기로 하자. 

첫째, 인류 시문학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립체시를 창작하고 립체시론을 제제기한 사람은 아폴리네르이지 결코 김파가 아니다. 프랑스시인 기욤·아폴리네르(Guillau Apollinaire, 1880〜1918)는 립체시의 창시자로서 프랑스 모더니즘문학의 선구자중의 한 사람이다. 김파의 립체시나 립체시론보다는 거의 100년 앞서 이미 립체시를 주창(主唱)하였고 또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립체시를 창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립체시론을 정립하였다. 

아폴리네르는 처음에는 상징주의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피카소와 친구로 사귀게 되면서 립체파미술에서 많은 힌트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아폴리네르는 1910년에 미술평론집 《큐비즘의 화가들》을 출간하기에 이르고 1913년에는 큐비즘(즉 립체주의)에 립각한 시집 《알콜》을 출간하여 현실아주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큐비즘 화가들이 현실을 제구성하려고 시도한 수법에 따라 사물을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큐비즘의 화가들》에서 아폴리네르는 예술가들은 반드시 새로운 미감을 가져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면서 그런 새로운 미감에 좇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자기의 시 창작에 옮겨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이를테면 표점부호를 취소하고, 시 자체의 리듬과 억양을 충분히 리용하여 음악성을 살리고 또 시, 회화, 음악 이 삼자를 결합시키려고시도했다. 

그의 시집 《칼리그람》은 시, 회화, 음악 이 삼자를 결합시키려는 그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비》,《마음》, 《거울》등 시들에서는 대상의 형상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근대의 인쇄술을 리용하여(주로는 활자의 배렬을 통해) 전반 시를 그 대상의 형상과 비슷하게 문자부호를 배렬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그림 같은 효과를 나타내려고 시도했다. 이
밖에도 시행 배렬과 조직에서 그는 계단식 시가의 격식을 창조했는데 이는 후에 쏘련의 마야꼽스끼에 의해 한걸음 더 발전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이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즘미술에서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후의 투시도법에 따른 공간표현을 변혁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한수의 시에서 음악, 회화 그림을 결합시킴으로써 립체적 미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시속에 그림이 있고 동시에 시속에 음악이 있어서 감상자들이 립체적이고 복합적인 미감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는 립체파미술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 이 점은 김파의 경우가 아주 비슷한바 김파도 립체파 미술작품에서 립체시의 첫 발상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하나는 1980년 기차 안에서 본 립체파 그림 - 잡지의 삽화이고 하나는 두 번째는 조선에서 들어온 립체사진이고,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을 통해 얻어들은 유럽의 현대미술의 한 류파인 립체파미술에 관한 상식이 김파가 립체시를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립체사진이 제일 큰 충격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립체사진이 커다란 충격을 주어 나로 하여금 립체시를 고안하게 끔 계발을 주었다. 그리하여 실험적으로 립체시를 쓰면서〈립체시〉라는 이름을 고안했고, 그에 따라 시적결구와 구조, 시적수사법, 시창작방법 등 여러 면에서 그것들의 규률성, 외적현상과 내적본질들을 탐구, 모색하기에 이른것이였다. 그리하여 〈립체시〉란 명제는 피카소의 립체화와 립체사진에서 계발되여 명명하게 되였고 시의 구조특징, 수사법적구조특징, 형상의 구조특징, 언어구조의 특징에 따라 그 명제 자체를 각각 립체구조, 립체주제, 립체형상, 립체어, 립체수사법 등으로 명명하게 되였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3쪽을 참조하라.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의 발상 계기가 어쩌면 이렇게도 류사한지 참으로 놀랍다. 필자는 이와 같은 류사한 발상 계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즉 하나는 거의 백년의 시간차이가 있는 우연한 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후자가 전자의 발상계기에서 힌트를 받고 자기도 피카소 등의 립체파 그림에서 힌트를 받고 립체시와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게 되였다고 이른바 립체시 발상계기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의 내함에 대한 비교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즘미술에서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후의 투시도법에 따른 공간표현을 변혁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한수의 시에서 음악, 회화 그림을 결합시킴으로써 립체적 미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시속에 그림이 있고 동시에 시속에 음악이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립체적이고 복합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이다. 아폴리네르의 립체시는 적어도 대단한 실험성을 띠고 있으며 근 백년 동안 마야꼽스끼를 포함한 수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어왔다. 그 영향의 여파는 아폴리네르가 립체시를 쓴지 백년이 가까워오는 몇 년 전에 김학철 옹의 서거를 추모하여 쓴 최룡관의 시 《산》에서도 보여 지지 않던가. 

그러면 김파의 립체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파의 립체시는 결코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처럼 부동한 예술형식의 시에서의 결합과 통일을 이룩하게 함으로써 립체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시도는 하나도 없다. 김파는 이른바 자기의 립체시에 대해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 것 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 있는 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김파도 이른바《립체구조, 립체주제, 립체형상, 립체어, 립체수사법》를 운운했지만 그 핵심은《다주제》이다. 김파의 정의에 따르면 다주제, 즉 두개 혹은 두개 이상의 주제를 가진 시는 모두 립체시이다. 김파의 이런 립체시, 립체시론의 창립은 중국의 헐후어(歇後語)를 빌린다면 그야말로 《바지를 벗고 방귀를 꾸는 것과 같이 아무런 쓸모없는 짓거리이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의 함축미가 있고 여운이 있는 시들치고 어느 것이 다주제가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시가 가지고 있는 다주제성에 대해 어찌 김파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겠는가? 이는 자고이래 시인묵객들치고 누구도 다 아는 상식이다. 

《암탉이 알을 낳는다》는 것은 분명히 진리이지만 이제는 상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백치가 나서서 《암탉은 암캐처럼 새끼를 낳은 것이 아니라 알을 낳습니다.》라고 세인들을 향해 선포한다면 그 누구도 그 선언을 틀렸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다들 포복절도하면서 배꼽을 잡을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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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김파의 《립체시론》에 대한 생각
2009-09-15 

                                                            /김관웅

우리 문단의 일부 문우들이 김파의 《립체시론》을 한번 읽어보라고 자꾸만 권하기에 바쁜중에서도 한번 대충 읽어보았다. 김파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김파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로부터 립체시 창작을 시도했고 그 기초 우에서 이른바 《립체시론》은 적어도 80년대 중반으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금년에 《립체시론》이 소책자로 출판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하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20년 동안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로고는 필자도 충분히 긍정하고 싶다.그리고 과감하게 자신의 리론체계를 건립하려는 저서립설(著書立說)의 용기도 충분히 긍정한다. 

김파씨는《립체시론》에서 이른바 립체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시주제의 다면성, 시결구의 다각성, 시형상의 양성, 시어의 다의성과 수사법의 복합성과 변이와 전환 등이 망라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구조가 외적 및 내적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립체구조, 립체형상구조, 립체수사구조, 립체어의 구조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호상 련관, 호상침투, 호상 배척되는 대립물의 통일체로 구성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 및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 있는 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5〜16쪽. 

김파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립체시는 모더니즘시들과는 대동소이하나 《모더니즘시에서는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복수성, 다시 말하면 주제의 복수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속에 또는 시창작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되는가 하는 그 규률성이 결여되여 있다.》면서 자기의 립체시나 자기가 인정하는 립체시들이 모더니즘시들보다는 한 수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립체시에 대해 김파씨가 숱한 말을 했으나 그 요점은《다주제》라는데 귀결된다.그런데 묻노니, 여운이 있는 좋은 시들 치고, 특히 고대 동서고금의 영물시(詠物詩)들이나 현대의 상징파들의 시들치고 어느 것이 다주제가 아닌 것이 있는가?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례로 들어 보자.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 간들 어떠하리 

이 시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혹은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음), 즉 자면의(字面義)와 암시의(暗示義)를 가지고 있다. 자면의(字面義)를 분석해볼 것 같으면 서정적 자아는 의인화된 청산속에서 흐르는 물과 대화하면서 한번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 올수 없으니 밝은 달이 있는데서 한번 놀다가 가라고 권하는 것이다. 암시의(暗示義)을 분석해볼 것 같으면 벽계수(碧溪水)는 사실 벽계수(碧溪守)라는 호를 가진 멋쟁이 선비를 암시하는 것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 자신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풍류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라는 멋쟁이선비더러 자기와 더불어 놀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 쓴 시이다. 이밖에도 이 시조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는 식의 급시향락(及時享樂)-제 때에 향락을 누려야 한다는 주제가 내포되여 있다고 해도 별로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녀석의 눈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쇠창살에 칭칭 감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오로지 천 갈래의 쇠창살만 보였고 
그 천 갈래의 쇠창살 뒤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강인한 네 발로 유연한 걸음새를 보인다만 
그 걸음새는 자그마한 쇠살창 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마치도 힘의 춤사위가 하나의 중심을 에돌기만 하는 듯 
바로 중심에서 위대한 의지는 현기증에 걸렸도다. 

다만 이따금 눈까풀을 소리 없이 걷어 올리니 
한 폭의 그림이 침입해 들어오지만 
사지가 긴장한 적막을 통과하고 나니 
마음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구나. 
-릴케 《표범- -빠리 동물원에서》 

상징주의 대표적인 시인 릴케의 이 시에서의 자면의는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 같이 빠리동물원의 살 창속에 갇혀 달출을 시도하느라고 쉴새없이 맴을 돌다가 맥없이 주저앉아버린 한 마리의 표범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표범은 단순한 인간의 상징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릴케 자신과 릴케 같은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표범은 “천갈래의 쇠창살”속에 갇혀 쉴새 없이 맴을 도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방향상실과 곤혹 그리고 방황을 상징한다. “위대한 의지가 현기중에 걸렸다”거나 전반 “우주”의 상실은 마치도 표범의 감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상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표범의 권태,고민, 곤혹과 방황은 바로 인간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인 것이다. 

시인은 로댕한테서객관적이고 랭정하고 정확한 조각수법을 배워 추상적인 관념(힘, 의지 등)을 표범의 각종 이미지(“강인한 네발”, “피곤한”, “눈길”, “맴을 돈다”, “현기증”, “춤사위”등)속에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하여 발레리가 언급했던 이른바 “추상적 육감”과 엘리어트가 제창했던 “사상의 지각화”의 효과를 획득했던 것이다. 이 시는 시종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곤혹, 방황과 고민의 주관적 정서를 상징하고 있다. 모택동의 시(詩)나 사(詞)들에도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짙은 시들이 많고도 많으니 김파의 말을 빈다면 립체파 시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바람은 봄을 보내고 
흩날리는 눈꽃 봄을 맞네. 
아직 벼랑에 고드름이 백장인데 
꽃가지는 예쁘네. 
예뻐도 봄빛을 다투지 않고 
다만 봄소식 전할뿐. 
산에 뭇 꽃들이 만발할 때에 
그 속에 웃으리. 
- 모택동《복산자 · 매화를 읊노라》 

중국시론의 말을 빌린다면 모택동의 이 사는 그야말로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盡而意無窮)》, 즉 그 주제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고 할 수 있으니 역시 김파 주장대로 라면 다주제의 립체시다. 

시의 상징성과 그에 따르는 암시성, 다의성의 특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론가들이 이미 수많은 견해를 발표하여 와서 이미 그것이 몇 년 동안 시인묵객들의 입에서 수없이 오르고 내려 이미 상식으로 된지 오래다. 특히 중국고대 시론에서의 《신운(神韻)설》은 전문 이 점을 연구대상으로 한 시론범주로서 중국전통시론범주에서의 핵심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중국시론중의 《의경(意境)설》이나 《언의상(言意象)론》이나 서양시론중의 《층차론(層次論)》이나 모두 정도부동하게 시가 갖고 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였다. 

공자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김파씨는 모른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오히려 아는 체 했으니 결국은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중국 당송 산문팔대가 중의 한 분인 류종원(柳宗元)의 우화 《귀주 땅의 당나귀(黔之驢)》에서 나오는 당나귀가 괴상한 소리로 영각을 안 하고 뒷발질만 안하고 가만히 있었더라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 모르는경우에는 가만이 입 다물고 있으면 면무식(免無識)은 하고 망신은 당하지 않는 법이다. 시론체계는 아무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빨이 없는 갓난 애기가 콩밥을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리치이다. 

김파씨의 《립체시론》을 본 후의 총적인 인상을 소견다괴(少見多怪)라는 성구나 혹은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로 개괄할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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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중국 연변의 저명한 시인이며 여러 쟝르에 걸쳐 다산작을 쏟아낸 김파 시인이 최근 가정의 역사를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흑색의 태양(3부작)'을 한국에서 출판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조선족 평론가 최삼룡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를 하였다.
 
'흑색의 태양'은 우선 소설의 텍스트가 남달리 독특하고 기발하여 광도와 심도가 있어 반도
남북을 위주로 한 전례에 없는 희귀 사실로서 우리 민족의 문학사와 동방문학사나아가는 세계문학사에도 없는 근대로부터 오늘의 후기 현대에 이르는 전반 인류 역사의 100여 년 사이에 창상지변을 보여준 기적적이고 경이적이며 미증유적이며 돌파적인전예가 없던 대형 거대 서사로서 현시되고 있다.
 
소설은 외할아버지 유승렬어머니 유동선아들 석숭이에 이르기까지 3대를 거치면 조선일본중국러시아폴란드 등 나라를 경유하며 겪어온 가정 및 주인들의 전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횡적으로 가정 백년사가 관통된 사건으로 이국타향에 살고 있는 조선이민들의 생활상구국독립을 위한 항일투쟁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2월 자산계급혁명 및 10월 사회주의 혁명소련 홍군과 조선독립군합병에서 불협화음으로 산생된 자유시 참변과 실망2차 세계대전과 광복중국 토지혁명과 가정의 수난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소련의 사회주의 연맹공화국의 해체와 오늘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의 전반 인류사 100년 풍운변화와 창상지변을 보여주고 있다.
 
최삼룡 평론가는 "소설의 제목을 '흑색의 태양'으로 단 것은 해체된 사회주의와 그 창시자 및 추종자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 이 글의 특색은 종적으로 가정소설이며 매개 주인공들의 자서전적 소설이고횡적으로는 민족수난의 소설이면서 사회소설로서 주체사상이 4개 이상이 되는 입체소설 텍스트로 현시되고 있다"고 자평했다.
 
   
▲ 김파 시인/소설가
김파 프로필  
 
중국 흑룡강성 해림현 출생.  연변작가협회 회원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한국 국제펜클럽 회원
주요 작품으로 '흰돛', '대륙에 뭍혀 있는 섬', 서정시집 '사랑의 별등 8부가 있고, 서정서사사집으로 '사랑의 별', 장편서시로 '천추의 충혼 안중근', 장편대하시집 '천년 고국 고구려()'가 있으며 시집론으로 '입체시론'이 있다.  이외 장막가극동화시집 등 다수가 있다.
1997년 중국조선족 백년문학사에서 유일하게 개인 명시집 '김파의 명시집'을 출판, 2014년 4월에 김파시비를 건립하였다전국 및 해외에서 10여 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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